폭력에 맞선 여성들의 불안을 그린 고딕 스릴러
낭독 및 내레이션 │김성현 배우
평론 │노태훈 문학평론가
일러스트레이터 │이나헌 작가
■노태훈 평론가의 평론
1810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앨리자베스 개스켈은 영국 사회가 본격적인 산업화·근대화의 시기로 접어들기 직전에, 빅토리아 시대라고 불리는 19세기를 살아간 작가입니다. 당대의 현실과 문화, 일상을 치밀하게 그리면서도 ‘고딕 소설’의 전범을 만든 중요한 작가이기도 하죠. 고풍스러우면서도 음산하고 불안한 기운을 풍기는 ‘고딕’ 양식의 건축 양식이 소설의 장르명이 되었다는 것은 바로 그 공간이 주는 매력이 무척 크다는 것일 텐데요. 특히 여성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서스펜스는 최근 많은 주목을 받고 있기도 합니다.
「회색 여인」은 평화로운 마을에서 가족들과 살아가던 ‘아나’가 결혼 이후 그곳을 떠나 모종의 사건들을 겪는 이야기가 액자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아나’가 자신의 딸인 ‘우르줄라’에게 남긴 편지는 딸의 결혼을 반대할 수밖에 없는 사연을 품고 있습니다. 잘생기고 부유하다고 믿었던 남편 ‘투렐’이 사실은 끔찍한 범죄자였고, 그 악연이 딸에게까지 이어지려고 하는 중이었으니까요. 더 자세한 이야기는 소설을 통해 직접 확인하시기를 바라면서 이 작품이 매력적인 이유를 몇 가지 말씀드려 보려고 합니다.
첫째로는 역시 소설이 그려내는 ‘공간’입니다. ‘아나’가 자신의 집을 떠나 결혼을 했다가 다시 도망치면서 거처를 찾기 위해 방황하는 여정이 그려지고 있기 때문에 소설에는 많은 공간이 등장하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는, ‘보주산맥에 있는 남편의 성’이 제일 중요한 곳이겠죠. 정체를 알 수 없는 불길한 기운과 하인들로부터 느껴지는 거북한 시선, 어두컴컴하고 음산한 방과 복도, 단절되는 소음과 폐쇄적이고 육중한 문까지 이 성은 ‘아나’로 하여금 공포를 유발하게 합니다.
이 공간이 여성이 가지는 불안과 결합하고 있다는 점이 두 번째 매력입니다. 친숙했던 가족과 고향으로부터 떨어져 갑자기 ‘출가외인’이 된 채로 남편과 낯선 공간에서 살아가야 하는 18세기의 여성이 얼마나 큰 두려움과 막막함을 느끼게 되는지 이 소설은 집요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남편이 무언가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예감과 더불어 ‘아나’는 임신을 한 상태에까지 이르게 되는데요. 특히 남편의 정체를 알게 되면서 극한의 공포를 경험하는 장면은 압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아나’와 함께 도주하는 하녀 ‘아망테’라는 인물입니다. 끝까지 ‘아나’를 지키면서 남장을 해 남편 행세를 했던 ‘아망테’와의 관계는 퀴어적으로 읽을 수 있을뿐더러 결혼이라는 일방적인 이성애, 가부장적 제도로부터 벗어나려는 여성의 의지와 욕망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설정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회색 여인」은 ‘여성 고딕 서사’의 대표작으로 지칭하기에 손색이 없는 소설입니다. 장르적 요소를 두루 잘 갖추면서도 다층적으로 소설을 해석해낼 여지도 풍부합니다. 복수와 위협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를 ‘회색’으로 훼손시켜야 했던 한 여성이 결국 그 피로 점철된 삶을 다시 딸에게 넘겨주게 되는 결말은 바로 이 질기고 기구한 운명이야말로 ‘공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최근 여성 작가들을 필두로 해 새롭게 고전을 소개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는데요. 앨리자베스 캐스켈도 한국의 독자에게는 아직 생소한 작가라고 할 수 있겠죠. 다양한 작품들이 더 많이 소개되기를 바라봅니다.